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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서 Book Journey/논어로 논어를 풀다

[논어] 3-21. 똘끼있는 부하는 어떻게 대하는가.

by 제니TV 2022.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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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팔일 (八佾)"

 

애공(왕)이 재아(=재여)에게 사직에 관해 묻자 재아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후씨는 소나무로 사직의 신주를 만들어썼고,
은나라 사람들은 잣나무를 썼고, 주나라 사람들은 밤나무를 썼습니다. 
밤나무를 써서 백성들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공자가 이 말을 전해 듣고는 다른 제자들에게 이렇게 한탄했다.
"이미 다 끝난 일이라 아무말 않겠으며, 제 마음대로 이룬 일이라 이래라저라래 간하지 않겠으며,
다 지나간 일이라 허물을 탓하지 않겠다."


[책의 좋은문장 발췌]

"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 없고, 거름흙으로 쌓은 담장은 손질할 수가 없다. 내 재여에 대해 꾸짖을 것이 있겠는가?" 한 마디로 야단칠 가치도 없다는 말이다. 재아는 머리가 좋아 말은 잘했는지 모르지만 게으르기까지 했던 것이다. 사실 이 정도 꾸짖음도 공자로서는 그 강도가 대단히 강한데 공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내가 원래는 사람에 대하여 그의 말을 듣고 나서 그의 행실을 믿었는데, 지금 나는 사람에 대하여 그의 말을 듣고 다시 그의 행실을 살펴보게 되었으니, 나는 재여로 인해 이렇게 고치게 되었다." 야단이 아니라 인간적인 모욕이다. 재아는 기껏해야 반면교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처럼 재아를 번지르르한 교언에나 능하면서 심보는 그릇된 인간으로 폄하했을까? 재아는 거의 망발에 가까운 발언으로 공자의 속을 뒤집는다."(기존의) 삼년상은 일 년만 해도 너무 오래입니다. 군자가 삼 년동안 음악을 하지 않으면 음악이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일년이면) 묵은 곡식은 이미 없어지고 새 곡식이 무르익으며, 불씨를 취하는 나무도 (일년이면) 바뀌는 상은 일년이면 그쳐도 됩니다."그나마 묻지도 않고 자기의견을 단정적으로 밝힌다. 아마도 공자는 그에 앞서 수도 없이 삼년상의 의미와 중요성을 반복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쳤을 것이다. 따라서 재아의 이 발언은 공자의 핵심 가르침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겨우 삭이고 공자는 물었다."쌀밥을 먹고 비단옷을 입는 것이 네 마음에 편안하냐" 재아는 조금도 물러서지않고 "편안합니다."고 답한다. "네가 편안하거든 그렇게 해라. 군자가 거상할 때에 맛있는 것을 먹어도 달지 않으며,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으며 거처함에 편안하지 않다. 이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인데, 네가 편안하거든 그렇게 해라."재아가 더이상 대꾸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자 공자는 다른 제자들을 보며 한탄하듯 말한다."재아의 어질지 못함이여! 자식이 태어나서 삼 년이 된 뒤에야 부모의 품을 벗어난다. 삼년상은 천하의 공통된 상이니, 재아에게는 그 부모에 대한 삼년의 사랑이 있는가" 

 


[내 생각정리]

이 내용은 깊은 울림을 주었다. 애공은 당시 왕이었고 재아는 공자의 제자 중 하나인데, 말만 앞서는 똘끼있는 제자라고 보면 된다. 공자의 제자라고 모두 훌륭했던 것은 아니다. 재아의 캐릭터는 똘끼이다. 그런 재아가 감히 스승을 넘어 왕에게 저러한 대답을 했을 때, 첫번 째 문제는 왕이 질문을 멍청한 자에게 한 것이고, 그 후 왕은 그 말을 듣고 그러려니..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나중에 공자가 들었을 때 공자가 한탄한 부분은 말할 가치도 없다. 라는 점이다. 아무리 공자라 한들, 공자 조차도 똘끼넘치고 부족한 제자에게는 가르침을 주지 않았던 점이 눈에 띄었다. 궂이 그런 자에게 애정을 쏟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도 살다보면 똘끼있는 사람들을 접하곤 하는데, 이 때 우리가 똘끼를 똘끼로 갚느니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겠다 싶은 말이었다.  

사실 나 조차도 조상을 모시는 제사나 3년 상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더 많았다. 정확하게는 3년 상에 대한 비판이라기 보다, 죽어서 후회한 들 살아계실 때 잘 하는 것이 더 이롭다는 의미였는데, 공자의 마지막 말에서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되었다. 아기가 태어나 3년을 부모 품에서 있은 후에야 부모의 품을 조금은 벗어나는데, 그에 대한 효로써 부모가 돌아가시고 난 후 3년 상을 강조한 것이었구나.. 싶다. 

하지만 여전히 살아계실 적에 잘해야 한다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고 하거나, 사라진다고 할 때 그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어리석게도 늘 그 자리에 있을 때에는 그것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과 같다. 곁에 있을 때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소중함을 잊고 사는 것은 없는지.. 오늘은 안부라도 묻는 하루가 되어야 겠다.

출처https://kr.123rf.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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